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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에 글쓰기 모임이 생겼다.
오랜만에 독후감 숙제 제출



탁석산 지음 | 책세상 | 2000년


     2002년 여름, Sony Style 매장에 전시되어 있는 일련의 캠코더 시리즈를 보며, 불현듯 나도 이렇게 제품 라인업의 Identity를 확립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정체성, 동일성이라고도 불리는 Identity 이슈들은 당최 그 의미조차 가늠하기 어려웠다. 모두가 쉽사리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정작 정체성이 무엇인지 명쾌하게 설명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서로 다른 사양과 가격을 가진 제품들이 모였지만
누가 봐도 동일한 identity를 가지고 있는,
로고가 없어도 소니다움을 느낄 수 있는 캠코더들.



     철학자 탁석산 씨의 책 ‘한국의 정체성’은, 정체성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이를 명확히 정의하는 일이 왜 이렇게 어려운 지 그 철학적 이유를 이해하기 쉽게 알려주는 책이다. 이 책에 소개되는 몇 가지 흥미 있는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간략히 읽고 한 번 생각해 보는 것 만으로도 ‘정체성’에 대한 시각을 달리할 수 있을 것이다.

1) 백 개의 조각으로 이루어진 배가 있다. 그런데 한 조각이 떨어져 다른 조각으로 대체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부분적인 보수공사가 진행되어 결국엔 백 조각 모두를 새로운 조각으로 대체했다. 이 경우 새로 보수된 배는 원래의 배와 동일한 배인가, 아닌가? (정체성을 유지하는가?) 또 다른 경우, 그 배를 한 조각씩 옆으로 옮겨서 원래의 배와 동일한 순서와 구조로 재조립하면서, 남겨진 빈 공간을 새로운 조각으로 채워놓았다면 결과적으로 생겨난 2개의 배는 원래의 배가 지녔던 정체성을 유지하는가, 상실하는가?

변화를 겪으면서도 동일성.identity이 유지된다면 그 동일성을 우리가 어떻게 확보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예를 들어, 자신의 사진을 꺼내놓고 보자. 돌 사진부터 지금의 모습을 담은 사진까지 나이별로 늘어놓아보면, 돌 때의 모습과 지금 모습 간에는 거의 유사점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사진 속의 인물을 동일한 사람으로 여긴다. 어떤 이유에서인가?

2) 우리가 겪고 있는 정체성 확립의 문제는 본질적으로 형이상학의 난제이다. 그런데 그 동안 우리는 이 점을 간과한 채 한국의 정체성 문제를 논해온 것이 사실이다. 정체성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문제로 여긴 나머지 정체성이란 용어를 언급하면서 별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 '정체성의 위기'라는 말은 일상어가 되었으며 '국적 없는'이란 표현도 흔히 들을 수 있다. 영화 [서편제]를 볼 때는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이야기하지만, [8월의 크리스마스]를 두고 한국적인 미와 정서를 논하지는 않는다. 이는 정체성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 현상이다. 두 영화 모두 한국인이 만든, 한국을 배경으로 하는, 한국의 이야기이다.

집단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것이 가능한가,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가능한가의 문제이다. 만득이의 국적은 한국이고 한국에서 태어나 줄곧 한국에서 자랐다. 그러나 만득이는 햄버거를 즐겨 먹고 침대에서 잠을 자며 청바지를 자주 입는다. 또한 힙합과 재즈를 좋아하고, 피카소가 최고의 화가인 줄 알고 있으며 (중략) 만득이에게 이런 것들은 너무나 자연스럽기 때문에, 이를 이유로 자신이 한국인임을 의심받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위 본문 중 [서편제], [8월의 크리스마스] 비교는 책이 출간되었을 당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심지어 그는 100년이 넘은 예전의 역사는 현재의 정체성을 논하는 일에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의견도 피력했다. ‘현재’ 존재하지 않는 것들의 시원(始原)을 파악하여 우리의 것을 찾는 노력이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현재성, 대중성, 주체성’을 정체성의 주요 판단 기준으로 제안한다. 즉 대중의 호응과 지지를 받으며, 주체적으로 받아들여져 현재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이 한국의 정체성 판단을 위한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의견으로, 현대를 살아가는 한국인의 공감을 얻어 많은 관객을 동원한 영화가 더 ‘한국적’이라는 저자의 의견에 동의하지만, 시원(始原)을 따지는 문제에 대해서는 쉽게 동의하기가 어렵다. 한국의 경우 장기간의 식민통치와 전쟁 이후 급격한 서구화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역사의 단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래미안 아파트 옥상에 기왓장을 얹는다 해서 현대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이 그 아파트에 한국의 정체성이 담겨있다 긍정적으로 공감할 리 만무하다. 태극문양만 해도 - 여전히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 애국조회 시간 이외에는 쉽사리 가치 있게 활용하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출시 1달 만에 단종된 LG-김영세 태극무늬 냉장고


 
     물론, 잃어버린 과거는 과거에 묻고, 현재에 충실하여 앞으로 100년 200년 우리나라를 유지하는 것으로도 한국의 정체성은 더욱 그 가치를 더 해 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역사를 그냥 포기하기 보다는 끊어진 고리를 현대에 맞게 되 살려내고자 지속적으로 노력하는 것이 근대화 시기 특수한 상황에 놓였던 한국의 정체성을 더욱 풍성하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루어가는 중요한 과정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한국의 정체성이란 ‘2008년 현재 대중적이고 주체적으로 한국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요소의 집합.’ 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정체성 상실의 시대.’라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정체성이라는 것은 상실되지 않으며,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꾸준히 변화하며 지속적으로 실재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의 정체성을 앞으로 어떻게 이루어갈 것인지, 정체성을 이루는 이 많은 요소들을 어떻게 가감할 것 인가.’ 하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삼성가전의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다. 디자인으로 정체성을 담아내는 작업은 또 다른 차원의 고민거리이지만 이 책 덕분에 Design Identity 이슈를 훨씬 폭넓고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입사 이후 D.I. 관련 과제를 진행함에 있어서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저자의 3가지 정체성 판단 기준 - 현재성, 대중성, 주체성 – 으로 볼 때, 삼성가전의 바람직한 D.I. 전략 방향은 현재의 현황에 충실하면서도 향후 방향성을 의지적으로 반영하는 디자인 철학의 설정과 ‘삼성다움’에 대한 구성원들과의 지속적인 공감대 형성, 그리고 실행력 있는 가이드의 설정 등이 주요 고려사항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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