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한겨레 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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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성해영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교수)

서울대 외교학과를 나와 행정고시에 수석으로 합격해 문화관광부에서 사무관으로 근무했다. 

그러나 고교 때 체험한 신비체험을 규명하기 위해 공무원 생활을 접고 

서울대에서 종교학을, 미국 라이스대학에서 종교심리학과 신비주의를 공부한 뒤로

서울대 HK(인문한국) 교수로 있다. 

종교체험이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 지 탐구중이다. 

저서로 오강남 교수와 함께 나눈 얘기 모음인 <종교, 이제는 깨달음이다>가 있다.



수업시간 교실 창밖 내다보다 경험한 무한과 영원

이 세상이 진짜가 아니라는 앎에 기쁨과 공포 교차




열일곱 살이 되던 해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찾아와 내 삶을 송두리째 뒤바꾼 ‘그 일’을 이제 적어볼까 한다.

 

1984년, 당시 고등학교 일학년이었던 나는 말 그대로 인생의 암흑기에 있었다. 사춘기에다 어려운 가정 형편, 가족 간의 불화 등이 함께 겹친 최악의 시기였다. 사업 실패로 큰 빚을 진 아버지는 모처로 도피해있었고, 혼자 남아 빚 독촉에 힘겨워하던 어머니는 자식들이 그저 문제없이 학교를 다녀주는 것만도 고마워했다. 그러니 나나 동생이 학업에 관심을 잃은 것은 당연했다. 중학교 때부터 악화되던 가정 형편은 이즈음 최악으로 치달았고, 남은 가족 모두가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암담한 날이 이어졌다. 지금 돌이켜 보아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어두운 날들의 연속이었다.

 

석양의 붉은 빛이 새하얀 건물 벽 물들이자 숨이 막혔다

 

그렇게 먹먹한 마음으로 살아가던 가을 어느 날이었다. 공부에 흥미를 잃은 나는 교실 맨 뒤 창가나 쓰레기통 옆 같은 구석에만 앉았다. 선생님 한분은 구석자리에만 앉는 나에게 아예 ‘코너 맨(corner man)’이라는 별명까지 붙여 주었다. 무슨 수업이었는지 지금은 전혀 기억에 없지만, 그날도 나는 창문 옆 맨 뒷자리에 앉아 창밖으로 한눈을 팔던 중이었다.

 

운동장 건너편 담장에는 몇 채의 건물이 바로 붙어 서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갓 칠해진 페인트 탓인지 벽이 새하얗게 빛나는 4층 높이의 건물 하나가 도드라져 눈에 띄었다. 마침 석양 무렵이라 붉은 햇빛이 운동장을 가로질러 건물의 하얀 벽을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었다. 새하얀 벽에 붉은 빛이 짙게 채색된 아름다운 모습이 내 눈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붉은 빛과 하얀 색이 어우러진 건물 벽은 숨 막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이 광경에 넋이 나간 나는 수업도, 선생님도, 내 짝꿍도, 교실도, 이 세상도 그리고 나 자신마저도 까맣게 잊은 채 붉게 물든 하얀 벽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 광경은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나를 기쁘게 만들었다. 이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아름다움에 취해 좋아진 기분은 커다란 행복감으로 변했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그 기쁨은 주체할 수 없이 계속 커져만 갔다. 게다가 기쁨이 내 마음을 꽉 채워나가면서 내 몸 역시 점점 뜨거워졌다. 행복감이 내 몸을 말 그대로 후끈 달아오르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에 넋이 나가 기쁨에 젖어있는데, 갑자기 내 발바닥에서 이상한 느낌이 시작되었다. 마치 작은 벌레처럼 조그마한 에너지 덩어리들이 내 발 속에서 꼼지락거리는 게 느껴졌던 것이다. 처음에는 몇 마리에 불과했던 ‘에너지 벌레’들은 갑자기 그 수가 불어나면서 내 발을 꽉 채우고 빠른 속도로 몸 전체로 퍼져 나갔다. 꼬물거리는 벌레들이 순식간에 위로 퍼져 나가면서 미칠 것 같은 행복감이 내 몸 전체를 가득 채웠다. 숨 쉬기 힘들 정도로 큰 기쁨이 내 몸과 마음을 채워나가던 중에 ‘그 일’이 마치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나를 후려쳤다. 결국은 거대한 기쁨이 나를 터뜨리고 말았던 것이다. 

 

말 할 수 없는 것들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이제 나의 어려움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 일’이 있은 후 28년 동안 나는 그 체험을 숱하게 생각해 왔다. ‘그 일’을 떠올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지만, 그 기억은 항상 나를 압도한다. ‘그 일’은 너무도 초월적이고 생경한 것이어서 아직도 내 마음과 내 혀를 굳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일’을 말로 표현하기란 그 때에도, 그리고 한참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불가능하다. 나는 ‘그 일’로 인해 인간의 언어가 얼마나 무력한지 뼈 속 깊숙이 깨달았지만, 나는 지금 ‘그 일’에 대해 감히 말하려고 한다.

 

‘그 일’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그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그리고 체험으로 알게 된 사람 역시 말하기가 불가능함을 누구보다 실감하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 인간의 언어는 우리가 믿는 것보다는 훨씬 더 무력하다. 특히 우리의 언어는 ‘그 일’을 표현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지 않다. 이 사실을 절감한 사람들, 즉 신비주의자들은 주로 상징을 선택한다. 그리고 굳이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면 이슬람 신비주의자 루미(Rumi)가 그러했듯 시와 노래라는 방식을 차용한다. 그렇지만 그들 모두는 궁극적으로 ‘그 일’ 앞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안다.

 

나 역시 침묵해야 한다. 하지만 28년 전 가을, 마치 날벼락처럼 내 속에 심어진 그 무엇이 그대로 머물러 있기를 거부한다는 걸 느낀다. 갑자기 찾아 왔듯이 ‘그것’은 이제 내 밖으로 나가려 한다. 직업을 비롯해 내 삶의 모습과 목적을 송두리째 바꾼 것처럼, ‘그 일’은 참으로 강력해 저항하기 힘들다. 결국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는 걸 알게 된 나는, 나를 위해서라면 차라리 안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는 일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남들의 반응이 두렵다. 우선은 ‘그 일’이 내 삶을 바꾸었지만, 우습게도 나 역시 ‘왜 하필 그 때’ 그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무슨 일인지도 모르면서 뭔가를 말해야 한다는 건 곤혹스럽다. 그렇지만 내 속에 뿌려졌던 씨앗이 싹을 틔우고 자라나, 나를 벗어나려고 하는 건 분명하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내 얘기를 받아들일지 알지 못해 두렵긴 하지만 말을 해야만 한다. 게다가 ‘그 일’을 온전하게 드러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는 나로선 글을 쓴다는 게 더욱 부담스럽다.

 

(차일피일 글쓰기를 미루면서 고민하던 나에게 용기를 북돋아준 김민석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메일을 통해 알게 되었지만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꿋꿋하게 삶의 새로운 차원을 발견해 가는 그의 태도에 참으로 큰 감명을 받았다. 고민 중에 받았던 그의 메일이 이 글을 쓰게 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 글을 통해 부디 이곳에서의 삶이 우리 삶의 전부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그가 발견하고 위안을 얻길 바란다.)



그 것(It)

 

아름다운 광경에 매혹되고, 이윽고 거대한 기쁨이 내 몸을 가득 채운 후 폭발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이 수업 중에 일어났다는 사실로 짐작컨대 그리 오랜 시간은 아니었다. 그리고 폭발하기까지의 과정은 내가 객관적인 태도로 관찰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진행되지 않았다. 마치 언덕을 내려오는 눈덩이가 점점 커져 가듯이 이 모든 일들은 거침없이 이어졌다. 나는 거대한 급류에 휩쓸리듯 빠른 속도로 다른 상태로 변해갔을 따름이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그 상태를 관찰하거나 통제할 수 없었다. 요컨대 그 과정은 놀랍도록 빠르고 강력해서, 거대한 기쁨이 결국 나 자신을 터져나가게 만드는 걸 그저 겪을 수밖에 없었다.

 

내 몸 속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난 후, 나는 ‘꿈이 없는 잠’과 같은 아무런 의식이 없는 상태를 순식간에 통과했다. 의식이라고는 전혀 없는 암흑의 터널을 휙하고 통과한 나는 완벽하게 ‘다른 차원’으로 갔다. 요컨대 나는 보이지 않는 손에 덥석 잡혀 짧은 순간 완전히 정신을 잃었고, 그 후 갑작스럽게 우물 밖으로 내동댕이쳐졌던 것이다. 잠깐의 암흑을 경험하고 정신을 차린 나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우물 바깥 세상에 와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 곳은 내가 알았던 모든 것이 깡그리 사라져 버린, 무한과 영원의 차원이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는 우물 밖 세계 그 자체가 되어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이제 ‘나(i)’는 ‘나(I)’ 혹은 ‘그것(It)’이 되었다. 일견 ‘나(i)’와 ‘나(I)’는 그 크기만 다른 걸로 여겨지지만, 실상 그 크기의 차이는 ‘무한(infinity)’이다. 즉 우물 안와 바깥을 구분하는 벽은 그저 하나의 벽이 아니라 무한 그 자체이다.

 

우물 안의 개구리는 무한의 벽을 꿰뚫어야지만 바깥으로 나간다. 다시 말해 그 벽은 한 발자국씩 끝없이 걸어가 넘을 수 있는 게 아니라, 단숨에 초월되거나 돌파(break through)되어야만 한다. 돌파를 통해 우물 속의 나(i)는 벼락처럼 ‘나(I)’가 되었다. 무한을 초월해 나(I)로 거듭났던 나(i)는, 혹은 우물 벽을 돌파해 바깥세상 그 자체가 된 개구리는 이제 나(I)의 목소리로 얘기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곳엔 오로지 나(I)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음에 적는 얘기는 나(i)에게 벼락 치듯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나(I)를 묘사한 것이다. 그러므로 아래 얘기의 화자는 내(i)가 아닌 나(I)이다.


나(I)는 누구인가? 나(I)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고, 자신을 완벽하게 의식하는 무한한 자의식이자, 더 큰 기쁨을 허락하지 않는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기쁨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나(I)는 ‘존재-의식-지복(存在-意識-至福/Sac-Cit-Ananda)’의 완벽한 통일체이다. 나(I)는 분리될 수 없는 완벽한 ‘하나임’이지만 셋으로 나누어 설명될 수 있다.

 

나(I)는 ‘존재’ 그 자체이다. ‘존재’는 있음이다. 그 있음은 상대(相對)를 허락하지 않는 절대(絶對)적 있음이다. 그 있음은 자기 바깥에 그 무엇도 허락하지 않기에 절대적이다. 즉 둘을 허락하지 않는 하나이다. 또 그 있음은 내적으로 어떤 나눔도 허락하지 않는 있음이다. 그러므로 그 있음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자 동시에 통으로 완벽한 하나이다. 그리고 절대적 있음은 오지도 가지도 않고, 늘지도 줄지도 않고, 그 어떤 변화도 허락하지 않는 불변의 있음이다. 그 있음은 ‘영원한 현재(eternal present)’ 속에 존재하는 ‘영원(eternity)’ 그 자체이다. 아울러 그 있음은 상대적 세계의 ‘있음-없음’이라는 이분법적 분리를 완벽하게 초월해 있는 ‘절대적 있음’이다. 그러므로 그 있음은 자신 앞에 ‘없음’을 허락하지 않는다. 결코.

 

나(I)는 ‘의식’ 그 자체이다. 절대적인 있음인 나(I)는 나(I)를 완벽하게 의식하는 무한한 자의식이다. 의식의 주체인 나(I)는 의식의 대상이 되는 나(ME)와 완벽하게 일치한다. 나아가 의식하는 행위는 주체이자 동시에 대상인 나(I)와 전혀 분리되지 않는다. 주체, 대상, 의식 행위 이렇게 셋은 나(I) 속에서 완벽하게 하나로 일치한다. 그러므로 의식 주체로서 나(I)는, 대상으로서의 나(ME)와 어떠한 분리도 허용하지 않은 채 완벽하게 존재 전체인 자신만을 의식하는 절대적 자의식이다. 또 ‘절대 자의식’인 나(I)는 ‘절대적 존재’로서의 모든 특질을 완벽하게 갖는다. 절대적 존재는 곧 절대적 의식이다.

 

나(I)는 ‘지복(至福)’ 그 자체이다. 나(I)는 어떤 것도 더 할 수 없는 궁극적 기쁨 그 자체이다. 이 기쁨은 절대적 기쁨으로 절대적 자의식인 나(I)와 완벽하게 동일하다. 즉 무한한 자의식인 나(I)는 절대적 기쁨 그 자체이다. 의식적 존재이자 절대적 존재인 나(I)의 참되고 유일한 본성은 절대적 환희이다.

 

나(I)는 분리될 수 없는 완벽한 ‘하나임’이지만 둘로 나누어 설명될 수도 있다. 나(I)는 결코 둘로 나뉠 수 없는 절대적 의식과 절대적 기쁨의 완벽한 결합이다. 나(I)는 더 이상 명료해 질 수 없는, 절대적으로 투명한 무한 의식이다. 동시에 나(I)는 절대적 기쁨에 약동하는 에너지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나(I)는 절대적 살아있음(生)이자 절대적 약동(躍動)이다. 절대적 기쁨의 에너지인 나(I)는 무한한 의식 그 자체와 결코 나눌 수 없는 방식으로 결합되어 무한한 운동을 한다. 이 운동은 공간 속의 움직임이 아니다. 그것은 분리 불가능한 존재 전체가 절대적 환희 속에서 들끓어 오르는 나(I)의 내적 진동(vibration)이다. 절대적으로 깊고 투명한 무한 의식이 지복의 에너지와 완벽하게 결합되어 무한한 진동을 하는 것이 바로 나(I)다.

 

나(I)는 이처럼 절대적 의식과 절대적 기쁨의 완전한 통일체이다. 나(I)는 안팎으로 어떤 분리도 허락하지 않는 절대 의식이자 존재이자 기쁨이자 약동이다. 나(I)에게 안과 밖은 없다. 그러기에 공간의 개념 자체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무한하다. 나(I)에게 과거와 미래는 없다. 그러기에 시간의 개념 자체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영원하다. 나(I)는 존재-의식-지복의 절대적인 ‘하나임’ 그 자체로 영원하고 무한하다.

 

나(I)는 모든 있음과 없음을 초월해 ‘그저 있는’ 절대적 존재다.


나(I)는 나(I)다.



우물 속으로 되돌아 옴


지금도 거대한 수수께끼이지만, 절대적 존재인 완벽한 나(I) 속에서 균열 즉 ‘깨어져 나감’이 갑자기 생겼다. 그리고 급격한 위축이 시작되었다. ‘잠이 없는 꿈’과 같은 의식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다시 순식간에 통과하고 나(I)는 나(i)로 축소되었다. 갔던 만큼이나 갑작스럽게 교실 맨 뒤의 창가 자리에 앉은 열일곱 살의 고등학생인 나(i)로 되돌아 왔다. 돌아와 보니 나는 여전히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어두운 영화관에서 바깥세상으로 나온 것처럼 눈이 부셨고, 동시에 주변은 이상스럽게 어두컴컴했다. 내 몸은 아직 뜨거웠고, 마치 부피가 큰 무엇이 작은 곳에 억지로 구겨 넣어진 것처럼 느껴져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 세계가 너무도 낯설었다. 게다가 선생님과 친구들 모두는 내가 떠날 때처럼 여전히 수업 중인 게 아닌가. 

 

나는 극도의 혼란에 빠졌다. 이게 뭐야? 내가 어디에 갔다 온 거지?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지? 내가 미친 건가? 나는 얼마나 그 곳에 머물렀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나(i) 밖에 섰던(ecstasy)’ 경험을 한 것은 분명했지만 어떻게, 왜, 그리고 얼마동안이나 그 상태에 있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그 곳에서 아무 것도 볼 수도, 들을 수도, 만질 수도, 느낄 수도 없었다. 그 곳에서는 나의 오감이 완벽하게 작동하지 않았다. 꿈에도 꾸지 못했던 엄청난 것들을 그 곳에서 경험하고 나는 오감으로 느끼는 이 세계로 갑작스럽게 다시 돌아왔던 것이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나(i)는 죽었고, 그곳에서 나(I)로 다시 태어났던 것이다. 그런데 교실에 함께 있던 그 누구도 이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도대체 어떻게? 

 

나는 공포에 휩싸였다. 나는 ‘그것’에 대해 들어본 적이 단연코 한 번도 없었다. 열일곱 살에 불과했던 나는 영원, 무한, 절대 따위를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지구 밖에 태양계, 태양계 밖에 은하계, 은하계 밖에 무엇하고 묻게 되면 갑자기 내가 발 딛고 있던 바닥이 사라진다는 식으로 간혹 느끼기는 했어도 영원, 무한, 절대는 의미 없는 단어에 불과했다. 그런데 나는 그 단어들의 의미를 선명하게 ‘알게’ 되었다. 마치 바나나를 처음 먹더라도 한 번 먹어보면 그 맛을 기억해 내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그곳에 다녀오면서 궁극, 영원, 무한, 절대, 지복이 무엇인지 ‘체험으로’ 알게 된 것이다.

 

게다가 그 경험은 갑작스럽게 나를 찾아와 진짜로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었다. 나를 포함해 내가 몸담고 있는 이 세계가 진짜가 아니고(not real),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진짜(really real)이자 궁극적 실재라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무한한 기쁨이자, 절대적인 자의식이자, 궁극적 존재’로 확장할 수 있는 그 무엇이 바로 내 속에 있다는 사실도 함께 알게 해 주었다. 요컨대 나는 이 사실들을 체험으로 알게 되었던 것이다. 마치 날벼락을 맞은 것처럼 내 의사와는 눈곱만큼도 상관없이.

 

한번도 듣지 못한 일이 도대체 왜 하필 나에게?

 

이렇게 해서 열일곱 살 가을 어느 날에, 정말 믿기 힘들었지만 내가 그리고 이 세상이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나(i)는 죽었고, 참된 존재는 나(I)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결코 부인할 수 없다는 걸 나라는 존재 전체가 알았지만, 이곳으로 돌아온 나는 그것들을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미칠 것만 같았다. 나(i)는 도대체 누굴까? 나(I)가 존재하는 전부이고, 참된 실재라면 왜 그곳에 나(I)로 머물러 있지 않고 이곳의 나(i)로 있는 걸까? 나(i)는 나(I)와 어떤 관계일까? 이곳과 ‘그곳’은 무슨 상관이 있을까? 게다가 나(i)의 죽음이 왜 그렇게 절대적인 기쁨의 원인이 되는 걸까? 이 세계가 어떻게 진짜가 아닐 수 있을까? 도대체 왜 이런 일이 하필 나에게 일어났을까? 도대체 왜? 단 한 번도 그런 걸 들어보거나 원한 적이 없는, 아무 것도 모르는 열일곱 살 사춘기 고등학생에게.


하지만 내 의사와 전혀 무관하게 일어났던 ‘그 일’로 인해 나는 무언가를 알게 되었다. 그 정확한 이유는 여전히 모르지만 어쨌든 나(i)는 벼락처럼 나(I)로 무한하게 확장되고 거듭남으로써 나(i)/나(I)의 궁극적 본성을 알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나(i)는 죽었고, 나(I)로 거듭났다. 요컨대 나(i)는 나(I)가 됨으로써 나(I)를 알게 되었다. 그 사실을 내가 받아들이든 거부하든 아무 상관없이.

 

‘그곳’은 이곳의 여러 ‘나(i)’들이 살면서 묻게 되는 모든 질문이 끊어지는 곳이자, 절대적 존재인 내(I)가 나(I)만을 의식하며 절대적인 기쁨 속에서 살아 약동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곳’을 우리가 아는 공간으로 오해하지 말라. ‘그곳’은 곧 나(I) 그 자체이니까. 우습게 들리겠지만 이 같은 앎은 열일곱 살인 나와 전혀 상관이 없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런 앎은 나를 포함해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그야말로 훌쩍 초월해 절대적 진리로 그저 존재할 따름이다.

 

내동냉이쳐진 개구리


그러나 문제는 날벼락이라는 점에 있었다. 나는 갑자기 벼락을 맞았다. 그런데 그건 거대한 축복의 벼락이자, 동시에 거대한 저주와 고통의 벼락이었다. 날벼락처럼 찾아와 믿기지 않는 앎을 주고 떠난 ‘그것’은 나와 전혀 상관이 없었다. 나는 그 경험을 원했던 적도, 그게 무엇인지 들어 본 적도 없었다. 심지어 그 일이 있고나서 서른 살이 될 때까지도 체험의 이름조차 몰랐다. 그러기에 ‘그 일’은 날벼락이었고, 단 한 번에 불과했지만 엄청난 기쁨과 고통의 씨앗이 되었다. 나라는 개구리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우물 밖으로 끄집어내져서 무한한 기쁨을 잠시 맛보았다가, 다시 우물 속으로 내동댕이쳐졌던 것이다.

 

나는 그 경험이 두려웠던 동시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좋았다. 나를 비롯해 이 세상 전부가 환상이라는 사실을 내가 도저히 부정할 수 없게 만들어 두려웠다. 또 이 경험과 경험이 알려준 것들을 누구와도 나눌 수 없어 무서웠다. 그렇지만 나는 참되고 절대적인 그 무엇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기뻤다. 게다가 그것이 내 속에 있다는 걸 알아서 엄청난 위안을 얻었다. 내 속에 무한한 기쁨이 있고, 세상의 고통과 괴로움, 그리고 그걸 겪는 나마저도 참된 실재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어 너무도 기뻤던 것이다. 그렇다! 내가 이곳에서 겪는 모든 고통과 슬픔, 좌절 등은 그 기쁨에 비하면 참으로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그곳에 되돌아 갈 수 없었다. 나는 이곳이 아니라 ‘그곳’으로 가고 싶었다. 가서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홀연히 나타났다 사라졌고, 그 이후에는 그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다시 나를 찾지 않았다. 찾아오기는커녕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는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 끔찍스러울 정도로 냉정하게 침묵을 지켰다. 나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고, 그 누구도 나에게 ‘그 일’에 관해 가르쳐주지 않았다.


단 한번이었지만, ‘그 일’은 나에게 그야말로 ‘무한’을 압축시킨 압축 파일과도 같았다. 얼마나 많은 것들이 그 속에 압축되어 있는지 누구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일단 압축을 풀면 무한이 쏟아져 나온다. 그래서 ‘그것’은 마치 끝을 볼 수 없는 책과도 같다. 아무리 책장을 넘겨도 마지막 페이지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그 흔한 바나나 맛조차도 오직 ‘체험’을 통해서만 안다

 

하기 힘들었던 얘기를 어렵사리 꺼낸 만큼 내가 그 동안 그 책에서 찾아낸 것들을 앞으로 찬찬히 적어보겠다. 이 글을 비롯해 내 글들에게서 무언가 마음에 끌리는 게 있으면 조금만 더 그대로 읽어주길 부탁드린다. 무엇보다 ‘그 일’은 나에게도 여전히 거대한 수수께끼이다. 왜 하필 ‘그 일’이 그 때 그런 식으로 일어났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 점에서 나와 ‘그 일’은 ‘전혀’ 상관이 없다. 그러니 답을 모르는 나에게 ‘왜 하필 너에게?’라는 질문을 던지기 보다는 나와 ‘그 일’을 분리해, 내 얘기를 인내심을 가지고 조금 더 들어주길 부탁한다. 다시 말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와 ‘그 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나라는 존재로 인해 ‘그 일’이 아무 것도 아닌 게 될 수 없고, 동시에 ‘그 일’로 인해 내가 뭔가 대단한 존재가 될 수도 없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 당시 아무 것도 모르는 나에게 일어났다. 하지만 여태껏 살아오면서 ‘그 일’이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나는, ‘그 일’을 보고해야한다는 뒤늦은 의무감을 느꼈다. 그래서 침묵이 최선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오지랖 넓은 일을 하고 있다. 그러니 나라는 보고자에게는 부디 무관심과 아량을, ‘그 일’에 대해서는 더 큰 관심을 베풀어 주길 부탁한다. 

 

이런 저런 이유로 뜸을 많이 들여 죄송스럽다는 말과 함께 한 가지만 더 덧붙이고 싶다. 바나나는 예전에 참으로 귀했지만 요즈음은 흔해 빠졌다. 하지만 그 흔한 바나나 맛조차도 오직 ‘체험’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알려진다. 팔만대장경만큼이나 긴 바나나 맛에 대한 기록을 읽어도, 직접 먹어 보지 않으면 바나나 맛을 결코 알 수 없다. 그러나 바나나를 먹어 보았다면 짧은 묘사로도 그게 바나나인지 수박인지 금방 알아차린다. 이건 동의하기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런데 만약 어떤 과일이 이 차원의 것이 아니라면 어떨까? 즉 보여줄 수도, 만질 수도, 냄새 맡을 수도, 맛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그 무엇이라면 어떻게 남들에게 그 과일의 존재와 맛을 알게 할까? 더욱이 무력한 인간의 언어로. 절대, 무한, 궁극, 지복이라는 과일은 과연 있을까? 있다면 그 맛은 도대체 무엇이고,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경험할 수 있을까? 이게 우리가 당면한 어려움의 본질이다. 어려울 게 분명하지만 도대체 얼마나 어려울지는 이제부터 함께 겪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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