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김규항의 블로그


얼마 전 이 지면에 “보수 부모는 당당한 얼굴로 아이를 경쟁에 밀어 넣고 진보 부모는 불편한 얼굴로 아이를 경쟁에 밀어 넣는다.”고 적었다. 진보적인 사람들의 위선을 질타하려는 게 아니라 자본의 파시즘 하에서 진보의 정체성을 함께 되새기려 한 이야기다. 교육 강연 같은 걸 하면 하나 덧붙인다. “보수 부모는 아이가 일류대학생이 되길 소망한다. 진보 부모는 아이가 진보적인 일류대학생이 되길 소망한다.” 

그런데 진보 부모들의 그런 소망에 대해 나는 섬세하게 살펴볼 필요를 느낀다. 그 소망엔 진심으로든 면피용으로든 사회가 좀더 나아지려면 진보적인 엘리트들이 생산되어야 한다는 명분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오늘 진보진영의 주요한 성원들 역시 30여년 전 대학에서 의식의 격변을 겪은 사람들이다. 자 그렇다면 대학에서 의식의 격변은 여전히 가능할까? 나는 어렵다고 본다.

오늘 진보진영의 성원들이 30여년 전 의식의 격변을 일으킬 수 있었던 건 그들이 대학에서 20여년 동안 군사 파시즘에 속아 살았다는 걸 한순간에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대학에, 특히 일류대에 들어가는 과정이란 20년 동안 자본의 가치관을 뼛속깊이 새기는 일이기도 하다. 남에게 속아 온 사람은 진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정신을 추스르지만 속임의 구조가 내면화한 사람은 좀처럼 정신을 추스르기 어렵다. 30여년 전 의식의 격변을 일으킨 사람들도 반공주의 가치관은 하루아침에 버렸으되 군사파시즘이 새겨놓은 성차별이나 권위주의적 습속들은 내내 남지 않았던가.

나에겐 이번에 중학교와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두 아이가 있다. 그들과 그들의 엄마와 나는 몇해 동안 천천히 대학 문제에 대해 대화하고 토론했고 결국 ‘대학은 갈수도, 가지 않을 수도 있다’는 데 합의했다. 그 합의로 내가 사는 집에선 이른바 교육문제로 인한 갈등이나 고통은 사라졌다. 지금 한국에서 말하는 교육문제란 단지 대입문제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런 합의에 참여한 가장 큰 이유는 그게 아이들이 정상적인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성장하는 데 최소한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입문제를 교육문제의 전부로 치환하여 좌우도 위아래도 없이 벌이는 이 ‘아동잔혹극’이 아이의 정신 영역에 남길 수많은 상흔들을 생각해보라. 만일 이 잔혹극이 이명박이나 조중동 지지자들이나 하는 짓이었다면 우리는 얼마나 경악하고 분노했을까. 나는 그 잔혹극 속으로 아이를 밀어넣을 수 없다.

내가 그런 합의에 참여한 또 다른 이유는 나 역시 한 아비로서 아이가 세상에 유익한 엘리트로 성장하길 바라기 때문이다. 대학 안 나온 엘리트도 있냐고? 무엇이 엘리트인가? 왜 우리의 엘리트 기준은 이명박이나 악취 나는 지배계급의 엘리트 기준과 다르지 않은가? 학벌이나 직업 따위 자신을 둘러싼 껍질과 실제 자신을 구분하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이 엘리트인가? 그런 껍질이 주는 기득권은 절대 포기하지 않으며, 만날 이명박 욕만 하는 것으로 손쉽게 정의로워지는 사람들이 진보적 엘리트인가? 

학벌이나 직업이 유별나지 않아 멀리서 보기엔 그저 평범해 보이지만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겐 참으로 특별한 사람, 아무리 곤란한 일도 마법처럼 해결책을 제시하는 현명한 사람, 슬픔에 빠진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따뜻한 가슴의 사람, 이 복잡하고 간교한 자본의 체제를 훤히 들여다보는 맑은 눈의 사람, 제 소신과 신념을 ‘그래도 현실이...’ 따위 말로 회피하지 않는 강건한 사람. 우리의 엘리트는 바로 그런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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