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os' Diary #753
20040905, 주일, 어서겨울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춤췄는데
우리는 왜 춤을 추길 꺼려할까.
20040905, 주일, 어서겨울
김동호 목사님 설교 중에서.
저는 북한 동포에 대한 생각을 정말 많이 하였습니다.
무슨 일을 할 때마다 저 돈을 북한에 보내면
우리 동포 몇 명이 살 수 있는데 생각을 하니
정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장로, 집사, 권사 임직식을 하면서 꽃도 달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북한 동포들은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꽃을 달고 임직식을 한다는 것이 너무 사치하게 여겨졌고
정신없는 일처럼 여겨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당회 서기를 하시던 장로님이 조심스럽게 저에게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목사님 말씀이 옳습니다. 그러나 모든 기준을 북한 동포에다 맞추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저는 그 말씀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 임직식에 꽃을 다는 일에 대하여 시비(?)를 걸지 않았습니다.
북한 동포를 불쌍히 여기고 저들을 돕고 섬기는 일을 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정도가 있고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정도와 한계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무조건 북한 동포만 이야기 한다면
우리의 소비생활은 자꾸 위축이 될 것입니다.
소비생활이 위축이 되면 산업이 위축될 것이고
산업이 위축되면 나라 경제가 어려워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북한 동포를 도울 수 있는 힘 자체를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북한 동포를 생각하고 저들을 도우려고 하는 것은 옳으나
너무 기준을 심하게 잡아 임직식에 꽃 하나 다는 것까지 시비를 걸 정도가 되면
그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삶의 도리’와 ‘삶의 여유’는 참으로 균형을 잡기가 어려운 개념입니다.
그러나 그 둘은 어느 것 하나도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개념입니다.
‘삶의 도리’도 중요하지만 저는 ‘삶의 여유’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자의 ‘여유’는 아름답지 못합니다.
그러나 ‘여유’를 부정시하고 죄악시하며
무조건 ‘도리’만을 강조하는 것은 참으로 피곤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동안 우리가 마음속으로 그려냈던 하나님은
기독교의 하나님의 모습이었다기 보다는
다분히 유교의 가부장적이고 점잖은 하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불교의 부처를 닮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저는 북한 동포에 대한 생각을 정말 많이 하였습니다.
무슨 일을 할 때마다 저 돈을 북한에 보내면
우리 동포 몇 명이 살 수 있는데 생각을 하니
정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장로, 집사, 권사 임직식을 하면서 꽃도 달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북한 동포들은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꽃을 달고 임직식을 한다는 것이 너무 사치하게 여겨졌고
정신없는 일처럼 여겨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당회 서기를 하시던 장로님이 조심스럽게 저에게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목사님 말씀이 옳습니다. 그러나 모든 기준을 북한 동포에다 맞추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저는 그 말씀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 임직식에 꽃을 다는 일에 대하여 시비(?)를 걸지 않았습니다.
북한 동포를 불쌍히 여기고 저들을 돕고 섬기는 일을 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정도가 있고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정도와 한계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무조건 북한 동포만 이야기 한다면
우리의 소비생활은 자꾸 위축이 될 것입니다.
소비생활이 위축이 되면 산업이 위축될 것이고
산업이 위축되면 나라 경제가 어려워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북한 동포를 도울 수 있는 힘 자체를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북한 동포를 생각하고 저들을 도우려고 하는 것은 옳으나
너무 기준을 심하게 잡아 임직식에 꽃 하나 다는 것까지 시비를 걸 정도가 되면
그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삶의 도리’와 ‘삶의 여유’는 참으로 균형을 잡기가 어려운 개념입니다.
그러나 그 둘은 어느 것 하나도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개념입니다.
‘삶의 도리’도 중요하지만 저는 ‘삶의 여유’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자의 ‘여유’는 아름답지 못합니다.
그러나 ‘여유’를 부정시하고 죄악시하며
무조건 ‘도리’만을 강조하는 것은 참으로 피곤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동안 우리가 마음속으로 그려냈던 하나님은
기독교의 하나님의 모습이었다기 보다는
다분히 유교의 가부장적이고 점잖은 하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불교의 부처를 닮은 하나님이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춤췄는데
우리는 왜 춤을 추길 꺼려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