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ozzyz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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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홍만

그 슬픈 눈빛의 거인을 처음 본 것은 씨름단을 강제로 해체당한 후 하루아침에 실업자로 내몰린 억울함을 호소하는 자리에서였다. 세계 초일류 기업의 어긋난 비전과 상식이 씨름이라는 운동종목을 반 미래지향적인 것으로 규정지었을 때, ‘그 씨름 따위’에 인생과 목숨을 걸었던 젊은이들은 목 놓아 통곡했고 그 한 가운데 거인이 서 있었다. 이후, 간혹 쇼프로에 등장한 그의 모습은 저렇게 소심하고 여린 사람이 어떻게 운동을 하나 싶을 정도로 측은한 마음을 자아내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눈빛은 축축했고, 몸짓은 애처로웠다. 거인이 K-1에 진출한다고 했을 때, 그리고 그 어설픈 주먹질을 목격했을 때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가 어서 다른 진로를 정하기를 바라마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나 마찬가지지만, 논평은 쉬운 법이다.

거인이 본야스키와 맞붙은 오늘, 난 그의 몸놀림에서 드라마를 목격했다. 본야스키의 살인적인 로우 킥이 작렬하는 순간 예의 어설퍼 보이는 동작으로 다리를 은근슬쩍 들어 올리는 거인의 몸짓은 본야스키의 야심만만한 로우 킥을 거의 완벽하게 무용지물로 전락시켰다. 기술의 성숙도와 무관하게, 이 거인이 차가운 이국의 링 한 가운데서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과 눈물을 흘렸을지 떠올렸다. 이 피비린내 나는 야만의 자본주의 콜로세움 위에서 ‘버텨나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밤을 고민과 인내로 지새웠을지 상기했다. 아직 거인은 모든 것이 서툴다. 펀치 하나, 발길질 하나, 제대로 자리 잡은 기본기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볼 수 없다. 거인에게 패배를 안긴 판정은 정당했다. 하지만 거인은 오늘 경기를 통해 결코 쉽게 얻을 수 없는 재산을 움켜줬다. 자신이 통한다는 것. 더 이상 다른 곳으로 쫓겨나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곳에 남아있어도 된다는 것. 난 그의 눈빛을 봤다. 그곳에는 삶의 위대한 드라마가 있었다. 난 최홍만을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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