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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포스텍과 한동대의 성공스토리

gomgomee 2006. 12. 6. 18:04

[중앙일보 이철호 칼럼]

지난주 포항을 다녀왔다. 포항에는 포스코와 과메기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포스텍(포항공대)의 방사광가속기. 이름을 보니 방사능 시설 같아 슬쩍 중요 부위를 손으로 가리고 현장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설명을 듣고 나니 딴판이다. 전자를 빛의 속도로 가속시켜 원자나 분자가 어떻게 물질 속에 배열돼 있는지 살필 수 있는 장치란다. 1987년부터 8년의 시간과 1500억원을 쏟아부은, 박태준 회장과 고(故) 김호길 포스텍 초대 학장의 집념 어린 작품이다.

나는 첨단과학을 잘 모른다. 그래서 뜬금없이 "본전은 뽑았느냐"는 첫 질문을 던졌다. 고인수 포항가속기 소장이 "혹시 네이처지 표지를 처음 장식한 우리나라 연구논문을 아느냐"고 되물었다. 당장 "황우석!"이라 내뱉으려는 찰나, 엉뚱한 대답이 돌아왔다. "비아그라 아시죠? 우리나라 바이오벤처가 바로 이 방사광속기에서 그 비밀을 풀어 2003년 처음 표지에 실렸습니다." 분자적 수준에서 비아그라의 작용 원리를 풀어내 더 우수한 발기부전제 개발의 길을 열었다는 것이다.

슬며시 오기가 발동했다. "기초과학에만 치중해 산업적 효과는 별로 아니냐"고 꼬집자 고 소장은 서운해 했다. 그는 애니콜과의 인연을 소개했다. 삼성이 2001년 휴대전화 핵심인 광통신 반도체를 자체 개발했는데 불량률이 70%를 넘었다. 아무리 뜯어봐도 원인을 찾지 못해 결국 포항으로 싸들고 왔다. 비파괴 투과 실험 영상을 분석한 끝에 몇 개의 회로가 당초 설계보다 조금씩 뒤틀려 있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후 통신칩 불량률이 10%로 뚝 떨어지고 삼성은 고급 휴대전화 시장을 본격적으로 공략했다. 그는 "자기 자랑 같지만 우리도 애니콜 신화에 단단히 한몫했다"며 은근히 제 자랑을 했다.



포항에는 눈여겨볼 실험 현장이 또 하나 있다. 외딴 골짜기에 자리한 12년 짧은 역사의 한동대. 아는 선배가 아들이 이 대학에 붙었다고 자랑하기에 무슨 이런 팔불출이 있나 싶었다. 그런데 만만한 대학이 아니었다. 수능성적 전국 상위 7% 이내, 입학 경쟁률만 8 대 1이 넘어 웬만한 서울 시내 유명 대학들은 저리 가라다.

포항의 한 산업폐기물업자가 세운 이 대학은 지금은 독립대학이다. 30%에 달하는 외국인 교수에다 상당수 강의를 영어로 진행해 그동안 20명 이상이 미국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이 대학 정연우 홍보계장은 "요즘 삼성.LG 같은 대기업들이 수십 명씩 장학금을 주면서 2학년부터 앞다퉈 입도선매한다"고 말했다. 기업이 주문하는 대로 반도체 설계면 설계, LCD면 LCD 식으로 맞춤 강의를 하니 입맛에 딱 맞기 때문이다.

물론 포스텍이나 한동대도 고민이 있다. 역시 돈 문제다. 포스코의 외국인 주주들은 "왜 회사 이익을 쓸데없이 대학에 투자하느냐"며 포스텍을 압박하고 있다. 정신적 지주인 박 명예회장의 생전에 확실한 수익모델을 찾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있다. 한동대도 재단이 빈약해 등록금과 기부금에 의존하는 실정이다. 다행히 교육부가 최근 40억원을 지원해 숨통이 트였다고 한다.


솔직히 우리의 생명줄은 딴 게 없다. 3000억 달러를 돌파한 수출과 끊임없는 연구개발뿐이다. 올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중국의 연구개발비가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로 올라섰다고 발표했다. 세계가 온통 미래를 선점하기 위해 난리다. 그동안 노무현 정부는 2518억원을 과거사 파헤치기에 쓸어 넣었다. 차라리 그 돈을 포스텍이 꿈꾸는 4세대 방사광가속기나 특성화에 성공한 지방대학 지원에 돌렸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나는 내가 내는 세금이 이런 곳에 팍팍 지원됐으면 좋겠다.

잠시 둘러본 포항에서 미래의 희망을 보았다면 지나칠까. 요즘 노무현 대통령이나 차기 대선주자들이 너무 외국만 밝힌다는 느낌이 든다. 뭔가 외국에 나가 폼 좀 잡아야 유권자의 눈길을 끈다는 구시대 발상이 아닌지 모르겠다. 굳이 그럴 필요 있겠는가. 차라리 포항에 내려가 우리의 미래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짚어보는 게 어떨까 싶다. 찬 겨울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요즘, 포항 과메기도 제철이다.

이철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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